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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의 재능있는 창작가 예술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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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이상(1917. 9. 17-1995. 11. 4) 작곡가.
경상남도 충무시의 몰락한 량반가정에서 태여났다.
어려서부터 음악에 남다른 취미를 가지고 있던 그는 17살때부터 약 10년간 서울과 해외에서 고학으로 첼로, 음악리론, 작곡 등을 배웠다. 그후 고향에서 고등학교 음악교원을 하면서 8.15를 맞이하였으며 주체37(1948)년부터 약 8년간 부산과 서울 등지에서 고등학교, 사범학교, 대학들에서 음악교수로 활동하였다.
주체45(1956)년부터 약 2년간 프랑스와 도이췰란드에서 음악리론과 작곡을 공부하였으며 그후 오래동안 도이췰란드에서 음악대학의 교수, 작곡가로서 적극적인 창작활동을 벌렸으며 이 시기 그의 작품들은 많은 음악가들의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일찍부터 남조선사회의 민주화와 조국통일을 위한 투쟁에 나섰던 그는 주체56(1967)년 6월 이른바 《동부베를린사건》으로 랍치되여 남조선에 끌려 가 2년간 옥중고초를 겪었다.
불우하였던 그의 운명은 김일성주석과 김정일령도자의 크나큰 믿음과 사랑속에서 애국적인 음악가의 한생으로 빛나게 되였다.
주석께서는 그를 조국의 품으로 불러 주시고 귀중한 시간을 내시여 여러차례 만나 주시였으며 그의 작품들도 몸소 들어 주시고 그의 애국적인 창작활동을 높이 평가하여 주시였다.
김정일령도자께서는 풍치 아름다운 곳에 훌륭한 집을 마련하여 주시였을 뿐아니라 평양의 중심부에 그의 이름으로 된 현대적인 음악당과 음악연구소를 세워 주시고 정기적인 음악회와 연구토론회를 진행할수 있도록 온갖 조건을 다 보장해 주시였다.
작곡가로서 그는 많은 음악작품들을 남겼다. 실내관현악 《락양》(1962년), 훌류트, 오보에, 바이올린, 첼로를 위한 곡 《영상》(1968년), 가극 《심청》(1972년), 첼로협주곡(1976년), 교향시곡 《광주여 영원히》(1981년), 교성곡 《나의 땅, 나의 민족이여》(1982년), 교향곡 제1번-제5번(1983년-1987년), 바이올린협주곡 제1번-제3번(1981년, 1983년, 1992년), 교향시곡 《화염속의 천사》(1994년) 등을 비롯하여 100여편의 음악작품들을 창작하였다.
윤이상은 동양음악의 정서를 서양의 음악표현수단과 기법으로 형상한 독특한 현대음악을 창조함으로써 동양과 서양의 음악적뉴대를 이어 주는데서 큰 역할을 한것으로 하여 우리 민족이 낳은 작곡가로 세계에 널리 알려 지게 되였다.
그는 도이췰란드의 《킬문화상》(1971년), 베를린음악대학 명예교수(1972년), 튀링겐대학 명예철학박사(1985년) 등의 학직과 학위를 받았다.
그는 애국적인 음악활동을 적극 벌리는 한편 주체80(1991)년부터 조국통일범민족련합 해외본부 의장으로서 조국통일을 위한 사업에 자기의 심혈을 다 바쳤다.
조국통일위업에 이바지한 공로로 하여 《조국통일상》(1990년)과 국기훈장 제1급 등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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